샘이야기

국청사우물의 전설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 18번지
국청사 우물은 남한산성(南漢城)의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인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廣州郡 中部面 山城里)의 산 18번지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뒤 조선왕조의 효종(孝宗)은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세우고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9개의 사찰을 건립한 뒤 승병(僧兵)을 양성(養成)하였다. 당시 그 9개의 사찰 가운데 하나가 이 국청사(國淸寺)인데, 국청사 경내(境內)에는 우물이 있었다. 그래서 절이 없어진 지금까지도 국청사(國淸寺) 우물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경기도 광주에 이원령(후에集이라고 개명)이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등에 종기가(腫氣) 나서 몹시 고생을 하였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한 이집은 홀로 계신 아버지의 종기(腫氣)를 고쳐 드리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는 한편,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종기는 쉽게 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원령은 꿈에 신선(神仙)의 현몽(現夢)을 보게 되었다. 절에 가서 백일기도(百日祈禱)를 해야만 아버지의 종기가 나을 것이라는 꿈이었다. 그리하여 이튿날부터 원령은 새벽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마을 뒷산에 있는 국청사에 올라 열심히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얼마 뒤의 일이다. 밤중에 잠을 깬 원령의 아버지는 몹시 목이 말랐다. 그러나 자신은 움직일 수 없고, 자는 아들을 깨우기도 측은하고 하여 그만 금붕어가 들어 있는 그릇의 물을 마셔 버렸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토록 오랫동안 낫지 않던 종기가 갑자기 터지면서 피고름이 마구 쏟아지는게 아닌가. 원령의 아버지는 급히 아들을 깨웠다. 잠을 깬 원령 역시 이상히 여기며 우선 금붕어가 죽지 않도록 그릇에다 물부터 갖다 채웠다. 이번에는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그 곱던 금붕어의 색깔이 별안간 시커멓게 변하는 것이었다. 원령과 그의 아버지는 크게 당황하여 부랴부랴 지난번처럼 국청사의 샘물을 길어다 부었다. 그제야 금붕어의 색깔이 원래의 황금빛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원령은 다시 그 샘물을 아버지의 종기에도 발라 보았다. 우물 물을 바르자 마자 종기는 거짓말처럼 아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꿈속에 나타났던 신선의 말대로 백일기도를 다닌 까닭에 금붕어를 잡게 되었고 그 금붕어를 기른 때문에 아버지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결국 신선은 국청사 우물의 영험함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 후 원령의 아버지가 국청사 우물로 종기를 고쳤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처에서 많은 피부병 환자들이 이 우물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이원령(후에 集으로 개명하였음)은 실존인물이다. 광주이씨(廣州李氏)를 중흥(中興)시킨 사람으로 자(字)는 호연(浩然)이고 호(號)는 둔촌(遁村)이다. 공민왕(恭愍王 )17년(1368)에는 신돈(辛旽)의 미움으로 생명에 위험(危險)을 받자 영천(永川)으로 피신(避身)하기도 하였다.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되자 개경(開京) 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讀書)로 세월(歲月)을 보냈다. 병자호란 이후에 창건된 국청사(國淸寺)는 고려말(高麗末)에는 존재하지 않은 사찰명(寺刹名)으로 그 자리에 사찰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며 다만 그 사찰의 이름이 전하지 않을 뿐 분명 절과 효자우물이 있었던 것은 추측할 수가 있다.
홈뿌리우물에 얽힌 이야기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장곡동 진말(長宗里)의 본래 명칭은 배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배형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을 안에 우물을 파고 식수로 사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 죽고, 또 도둑이 심해서 마을이 망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고심하던 중 어느날 이 마을의 촌장 꿈에 신령이 나타나 '배형국'이란 마을명을 쾌명해 주며,
"배 안에다 우물을 파니까 배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촌장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의논 끝에 마을 내의 모든 우물을 메우고, 마을에서 벗어난 지역의 홈뿌리의 우물을 파서 식수로 쓰니, 그 후부터 마을에 우환이 없어지고 도둑도 자취를 감추어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높은우물에 얽힌 전설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시흥시 정왕동에 높은우물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다. 현재 시흥시의 많은 설화와는 달리 역사와 거의 일치하는 전설이다.
시흥시의 역사 인물중의 한분이신 송운 원성모장군님때의 병자호란때 전설이다.
가뭄이 극심한 그해 오이도 공원이 있는 생금물의 돌줄산에서 지휘를 하고 있던 장군님은 아군 진지가 있는 정왕산(봉화산=봉우재)에 갈증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다는 파발을 받고 아군 진지가 있는 산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이예 놀란 병졸들이 활을 보니 #(우물정자)가 쓰여진 장군의 화살이었다.
어찌하여 ! 장군님이 우리를 향하여 화살을 쏘다니 하고 화살을 뽑았다.
그런데 뽑는 순간 샘물이 쏫아지는 것이었다. 이에 병사들은 갈증을 해소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오랑케를 무찔렀다는 전설이다.
오늘날 봉화산을 토취하여 샘물의 근간이 없는데도 높은 우물에는 이상하게도 오늘도 샘이 솟고 있다.
노루우물의 전설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매꼴마을
예전에 장곡동 매꼴마을에 노루우물가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거지는 말할 것 없고 스님이 시주를 청해도 시주는커녕 목탁과 배낭마저 빼앗아 버리는 고약한 성질이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물론이고 근동간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나쁜 소문이 나 있는 터였는데, 하루는 아주 잘 아는 고명한 스님이 왔다는 소문이 마을에 널리 퍼졌다. 그 욕심쟁이 부자는 그 스님을 불러 어찌하면 우리 집에 동냥아치나 구걸뱅이가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스님이 말하기를, "당신네 뜰 앞에 있는 노루바위를 깨뜨려 버리면 다시는 거렁뱅이가 오지 않을 것이오."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욕심쟁이는 그 길로 큰 망치를 들고 가서 노루의 목을 쳐서 목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때 목에서 선혈이 뻗어 올랐다고 한다. 그 후 그 집은 차차 망했다고 한다. 한편, 목에서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뻗어 올라 우물자리에다 절을 짓고 정성을 다하자 피가 멎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부잣집터에서는 옛날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는데, 1950년대 어떤 사람이 옛 절터에 '대안사'란 절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도 그 노루의 일부라고 하는 쑥돌의 일부가 우물 속 깊이 박혀 있으며, 그 노루우물은 1970년대 초에 복원하여 마을 공동빨래터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활용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이 마을에서는 어려운 사람이나 거지를 업신여기거나 괄시하면 노루우물 부자처럼 패가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아울러 걸객을 대접하는 미풍이 전래되고 있다.
장독골샘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너남리
읍내 서남리 삼거리에 '장독골샘'이란 우물이 있다. 이 삼거리 북편에 30평 가량의 공지가 있고 이곳에 사방 2.5m, 길이 4m 가량의 샘 두개가 있다. 이중 하나는 근래에 판 샘이고「倡梁達泗碑」곁에 있는 샘이 바로 장독샘 또는 장군정(將軍井)이라 부르는 우물이다. 장독이라함은 군인들 기(旗)중 장군 표지기를 이르는 것이다. 이곳에 을묘 왜변 때 양달사 장군이 그의 기를 꽂아 물을 솟게 했다고 해서 장독샘 또는 장군정(將軍井)이라 하는 것이다.
양달사는 제주 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와 청주한씨 사이에서 1519년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해남 현감을 지냈다 1555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관직을 버리고 시묘를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이무렵 왜구들은 1552년과 53년의 두행에 걸쳐 제주를 노략질하고 1555년 5월 6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달양진에 들어와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이 때문에 당시 영암군수 이덕견은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않고 항복해버려 며칠사이에 영암군 관아가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게 됐다. 영암읍에서 9km거리에 있는 봉호정(鳳湖亭)에 귀향해 있던 양달사는 이 비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상중(喪中)의 몸이라 어쩔바를 몰랐던 그는 그 사촌동생으로 부제학의 자리에 있던 양서정에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상의했다. 양서정 부제학는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거늘 어찌 이 난리를 보고만 있으려 합니까"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즉시 형 달수, 동생 달해 및 달초와 더불어 의병을 모집해 영암읍으로 향했다.
이미 왜구가 읍내 주변으로 들어와 있으므로 이들과 3일간이나 격전을 벌였다. 당시 관군(官軍)은 완산부윤(完山府尹)으로 있던 이윤경(李潤慶, 1498~1562년)이 인솔했다. 전쟁터에는 물이 없었다. 연 3일간의 격전 끝에 적에게 포위되어 군량미가 떨어지고 음료수가 고갈되어 큰 혼란과 굶주림과 갈증을 격게 되었다. 군사들의 동태를 살피던 양장군은 군령기를 높이 들고 한번 호령한 뒤 땅을 내리찧자 신기하게도 「쾅」소리와 함께 군령기를 찍었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너무나 뜻밖의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함성을 올리며 솟아오르는 물로 갈증을 달래고 사기가 충천하여 수 많은 외적을 섬멸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샘을 장독골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왜변은 양장군의 창의군 활약에 힘입에 진압했으나, 자신은 상중의 몸으로 출전한 것이라 관군을 이끌었던 이윤경에 그 공을 모두 돌렸다.
결국 이윤경은 그 공으로 전라감사가 됐고 뒤에 병조판서까지 됐다. 양장군은 이 전쟁때 등에 창을 찔렸는데 고향에 돌아가 3년 시묘를 마친 뒤 결국 부상당한 여독을 뿌리뽑지 못해 41세 되던 1559년 죽었다. 뒤에야 이 사실이 알려져 죽은 뒤 100년만인 현종때 좌승지로 추증됐고 충신으로 정려했다.
삼정강원도 고성군
고려때 어느 원님이 관직에 오래 있으려면 3곳에 우물을 파고 4곳에 연못을 만들고 5가지의 나무를 심으면 관직에 오래 머물 수 있고 장수한다는 말을 듣고 간성골에 3곳에 우물과 4곳의 연못을 파고 은행나무 등 5가지의 나무를 심었다 한다.
그 후 이 우물과 연못, 나무등을 가르켜 三井 四池 五木이라고 불러왔는데 지금 三井과 四池는 개화되면서 점차 외지에서 찾아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매몰되고 집들을 짓고해서 모두 없어졌으나 五木중에 하나가 현재 군청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로 고목이된 이 은행나무도 지난 1964년 가을 썩은 곳에서 불이나 연 3일동안 타다 남아 지금은 봄이 돼도 잎이 절반 밖에 피지 않고 있다.
오목 중 은행나무 2그루는 1950년 6.25동란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암은행나무는 6.25때 폭격으로 없어지고 현재는 군청입구의 은행나무가 유일하게 살아 있다.
삼 정(三井) ▷ 현재2개소 보존되고 있음
- 군청앞 현존, - 천주교입구 중앙여관앞 현존, - 현 산림조합과 하리사무소 부근
사지(四池) ▷ 현재는 전부 매몰되어 없음
- 상리 460번지 함희조씨 대지 부근, - (구)경찰서 앞 길 건너편, - 간성우체국 대지, - 하2리 사무소 부근
오목(五木) ▷ 오목중 은행나무 이주는 6.25동란시까지는 있었으나 그중 암은행나무가 폭격으로 없어지고 현재는 숫은행나무1주만 군청앞에 잔존하여 있음, 다른 3주는 모두 없어짐
연동 우물전라북도 익산시 연동(蓮洞)
연동의 공동우물은 전부터 물이 잘 나기로 유명했고, 그 우물 바로 밑에 못이 있었으며 그 못에 연이 가득 차 있어 생긴 이름. 전에는 그 우물을 부자샘이라 했으며 샘물이 나는 동안 부자가 그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물맛 좋은 샘물 찾는 효자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판암으로 8각으로 짜올렸는데 상부구조는 없어지고 현재는 시멘트로 보강하여 부여여고에서 우물로 사용하고 있다. 백제 궁정에 있던 우물로 왕이 마셨다는 전설이 있어 어정이라고 부른다. 이 우물에 대해서는 조선 고종 17년(1880)에 중수한 부여 객사의 중수기에 어정이 부여객사의 동북쪽 정원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팔각정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금암리 신촌부락 앞에 전승엽(全昇燁)효자의 효자정(孝子亭)이 있다.
지금부터 400년전, 전승엽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부모에 효도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아들의 극진한 효성은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노환으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친상을 당한 전효자는 정성껏 초종장례를 마치고, 묘막을 지어 3년 거상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삭망차례를 정성드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만 되면, 어디서 날아오는지 산꿩이 한 마리 날아와서 떨어져 있었다. 전효자는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그 꿩으로 제물을 만들어 제를 지내곤 했다.
지성을 다하여 삼 년 시묘가 끝나는 날이었다. 난데없이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묘 앞에 나타났다. 이에 전효자 겁이 나서 비키니, 그 호랑이는 꿇어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 직감한 전효자는 호랑이 옆에 다가갔다. 그러자 호랑이는 일어나 어슬렁 어슬렁 산 아래로 내려갔고 전효자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호랑이는 동네 어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앞발로 땅을 후벼서 파내고 있는게 아닌가?
그때는 마침 여름날로 오랜 가뭄으로 온 동네가 먹을 물을 구하지 못하여 기진맥진해 있을 때였다. 또 이 동네는 우물 물이 시원치 못하여 항상 고통 속에 살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의 소원은 누구나 시원한 맑은 물이 솟는 우물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산으로 돌아간 뒤에 바로 그 자리를 파보니, 정말 맛 좋고 시원한 물이 샘솟는 우물이 생겼다. 이에 온 동네의 소원이 성취되었고, 그 우물은 지금도 맛 좋은 생수(生水)로 이름 나있다.
원효정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번지
신라의 고승이었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나이 서른이 넘어 소요산에 머물며 수행을 쌓았다. 그 분의 덕행은 차츰 온 마을에 퍼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소요산에 모여들기 시작 하였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부족한 식수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요산은 돌산으로 마땅한 샘터를 찾기가 어려웠다. 모두들 걱정만 하고 있던 차에, 하루는 선정에 들어 지맥(地脈)을 관찰하다 바위 사이로 깨끗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음을 발견한 원효대사는 바위틈을 꿰뚫어 깨끗한 물이 흐르게 하였다. 그 이후 신기하게도 이 물을 마신 사람들의 속병이나 갖가지 위장병이 치료되었다고 한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만든 우물이라 하여 '원효정(元曉井)'이라 불리었던 것이 각지에 만병통치의 약물로 소문이 퍼져 특히 음력 3월 3일 삼짓날에는 물을 마시러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이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줄기가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상주승려(常住僧侶)가 수행에 어긋날 때에는 물이 조금씩밖에 나오질 않았다 한다. 또한 마음속에 음흉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는 사람들이나, 몸이 청결하지 못하다든지 육류를 즐기는 사람이 몸을 불결하게 하고 물을 마시려 하면 실그림자같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어 끝내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한다.
한번은 어느 아낙네가 이 곳의 물을 마시려 하다가 실그림자 같은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은 보았다. 스님을 찾은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고 웬일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스님은 그녀와 함께 가서 물을 확인하고 떠 주었는데 아낙네는 여전이 물에 벌레가 있어 목에 걸릴 것 같아 도저히 못마시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아낙네가 자기는 평소에 절에 가는 것을 싫어했고, 시어머니가 억지로 가자고 해서 같이 따라와 약수가 좋다고 하기에 먹으려고 했던 것과 몸이 생리(生理) 중이고 오기 전날에도 불고기 지짐을 해 시어머니 몰래 다른 식구들과 먹었다는 것을 실토하였다 한다.
안양리 찬우물 안양시에 편입되기 전 안양읍 안양리는 조선 말기까지도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현 안양5동)였는데, 여기에도 지금의 과천시 갈현동에 있는 찬우물 못지않게 물맛이나 전설로 유명한 또 하나의 찬우물이 있다. 이 찬우물은 수리산 줄기에 위치한 많은 우물 중에도 그 수질이 매우 좋고 수량이 끊이지 않고 일정한 것이 천혜의 특징이다. 수리산 지형은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세로 찬우물은 그 가슴 부분에 해당된다고 하니 그 샘물이 마르지 않음은 호랑이의 젖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에 몹시 가난한 부부가 살았는데, 생업이라고는 산등성이의 몇 뙈기 밭과 다랭이논 몇 두락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인 연고인지 여러 해째 가뭄이 들었다.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짓는 이 부부는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끼니는 고사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기조차 힘겹게 된 상황이었다. 생각다 못한 이 부부는 마지막 남은 곡식을 털어 음식을 마련하고 수리산정에 올라 며칠 밤낮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다 잠시 깜박 졸았던가 싶었는데, 꿈속에 수리산 산신령이 나타나 하는 말이, 그대들의 정성이 갸륵하여 물을 주겠노라. 지금 당장 내려가서 그대의 논밭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우물을 파도록 하여라 이 말을 들은 부부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분부대로 하였다. 과연 그 가뭄속에서도 엄청난 양의 물이 펑펑 솟아나지 않는가. 부부는 다시 무릎을 꿇고 신령님께 감사를 드린 다음 정성을 다하여 이 우물을 관리하였다. 그 후로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게 되어 오래지 않아 근동에 이름난 알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여름에도 우물 주변에 얼음이 얼 정도로 몹시 차고 마르는 법이 없어 지금도 안양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우물이다.
용왕이 점지한 약수물충청북도 성군 맹동면 봉현1리
이곳과 연결된 약수터 물은 맞은편 유래비 뒤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현재에는 오염되는 것을 막기위해 상판부분을 막아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다는 것. 유래비에는 이 곳 약수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약수터 입구에는 360여년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어느날 꽃가마 연이 행열을 하다 이 나무밑에서 쉬게 되었다. 여름날 무더위 속에 목이 말라 이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갔다 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임금의 행차라는 전설이 있으며, 그 후 이 우물을 용왕이 점지한 약수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마을 주민이 이 우물을 사용했고 인근 마을 우물이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낼때 이 약수터의 물을 길어다 부으면 물이 다시 솟아 오른다하여 용왕이 점지한 신비로운 약수로서 마을에서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제물을 차려 놓고 용왕님께 정성을 다해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외에도 바위가 많아 지명되기 시작했다는 바위배기가 개고개에 위치해 있는데 이에 대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돌깨는 사람이 이를 가져가기 위해 돌을 깨려 하니 피가 나와 가져가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삼정골대구광역시 남구 봉덕 3동 대덕산
삼정골은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 3동 대덕산 푸른 숲 계곡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전 (당시 경북 달성군 하수면)에는 10여 채 정도의 가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주민은 농업에 의존하고 살았다. 당시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점차 주민이 늘어나면서 식수해결의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부터 40여 년전 주민들이 식수 해결을 위해 여러 곳에 우물을 파 보았으나 물이 나오지 않거나 루이 나더라도 금방 말라 버려 여러 번 헛수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 중 가장 웃어른이 백일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백일 기도가 끝날 무렵 어느 날 밤 꿈에 수염이 허옇고 긴 지팡이를 짚고 대덕산 꼭대기에 나타난 산신령이 이르기를 "숭늉물에 먹을 풀어 양동이에 담아 한 밤중에 별 셋이 양동이에 들어오는 곳을 찾아 우물을 파라"고 하여 이에 온 주민이 힘을 합하여 제사를 드린 후 숭늉물에 먹은 푼 양동이에 별 셋이 들어 오는 장소를 찾아 우물을 파니, 이 우물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았으며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 사람의 새 젓줄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있던 두 개의 우물에 한 개의 우물이 더 생겨 우물이 세 개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삼정골로 붙여졌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부터 상수도 시설로 인해 원래 있던 두 개의 우물은 메워졌다.
효자정의 금잉어경기도 남한산성의 북문안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
효자정은 남한산성의 북문안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다.
오랜 옛날에 그 산성 북문안 마을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정남 이라는 한 소년이 있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정남은 자신의 능력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한편 극진히 아버지의 병환을 간호하였으나,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이다 보니 아버지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 마을을 지나가던 한 나그네가 커다란 잉어 한 마리만 구해 고아 드리면 아버지의 병은 깨끗이 완쾌될 것이라고 하였다. 정남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잉어를 구하러 나섰다. 그러나 때는 마침 겨울이라 강물이 얼어 잉어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많은 강을 모조리 헤매고 시장을 찾아봐도 끝내 잉어를 구할 수가 없었다. 정남은 잉어를 구할 길이 없어 마침내 절망과 실의에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오던 도중 호젓한 산기슭의 바위 밑에서 아직도 얼지 않은 조그마한 우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정남은 굶주림에 지친 배를 우물물로 우선 허기를 채우고 아버지에게 드릴 잉어를 구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빌고 빌었다. 오랫동안 우물을 바라보고 소원을 빌다 무심코 우물을 들여다본 순간 정남은 깜짝 놀랐다. 우물 속에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놀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하여 우물에 잉어를 보내준 것이었다. 정남은 기쁨에 넘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잉어를 잡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밤새도록 정성껏 고은 잉어국을 아버지께 드렸다. 잉어국을 먹은 아버지는 과연 나그네의 말대로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정남을 하늘이 낳은 효자라고 칭찬하고 다같이 잉어를 내려준 하느님께 감사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그 우물을 효자 우물 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이 우물에 잠깐 멈추어 전설이 담긴 효자 우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도 한다.
돌우물전설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석정리
대곶면 석정리는 조선시대까지 통진현 고리곶면 읍정리였다. 이 곳 '돌우물'의 물맛이 좋아 통진현의 원 이 우물의 물을 길어오게 하여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골(고을)의 우물 곧, '골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라고 하다 보니 그 이름이 전해져 주민들은 전래적으로 '골우물'로 불러왔으나, 일제강점기에 민족정기와 역사적 의의를 말살하기 위해 단순히 의미만을 옮긴 '석정(石井)'으로 고쳤다. 이 '돌우물'에는 전설이 서리어있다. 조선조에 김포 장릉(16대 인조의 부친으로 추존왕인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에 양주에서 이 곳으로 개장 하며 능 역사(役事)를 할 때, 광중(壙中)을 파니 많은 샘물이 솟구쳐 하관(下棺)을 할 수 없어 혼란을 겪던 차에 지관이 수맥을 따라 현 위치(당시는 갯벌이었다 함)에 도착하여 조그만 샘물을 크게 파헤치게 하니 돌틈에서 많은 수량이 솟구쳐나왔고, 그 결과 장릉의 광중에서 솟던 물이 멈춰 능역사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1787년 무렵 옥과(玉果, 전라도 곡성군 소재) 현감이 우물 옆에서 살았었는데 방문객이 너무 많아 불편하게 느끼던 차에 하인이, 문전적미(門前積米)를 하러 온 중에게 객이 안 오게 하는 묘방을 물으니, 우물 안에 있는 거북형상의 돌에서 그 머리를 깨어 버리면 된다고 하여, 그 말대로 했더니 출입객은 한산해진 대신 곧 그 집이 망해 버렸다고 한다. 오봉산은 이 마을의 기안역을 하는 주신의 원천이 서리어 있는 곳이다. 이 곳에는 옛날에 장사가 있었 는데, 그가 이 우물에 내려와서 무릎 끓고 물을 마신 무릎 자국과 지팡이 자국, 소변을 본 자국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다. 이 우물은 전체가 돌로 되어 있는데 동남간과 동북간에 거북 형상과 용의 형상이 있고, 샘은 동북방간 오봉산 낭맥간방에서 솟는데 수량이 엄청나서 옛날에는 이근방 못자리를 모두 꾸려나갔다고 한다. 현재도 김포에 유례가 없는 영천(靈泉)으로 알려져 경향각지에서 물을 길러 오는 사람이 많다. 1991년 중추절에 주락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적연와, 특수강으로 담을 두르고 주변을 정화(淨化)하여 전설과 함께 자랑스럽게 보전하고 있다.
조왕동(助王洞)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우성면 동곡리에 조왕동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인근 목천리에는 소우물, 우정(牛井) 또는 우천(牛泉)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곳은 인조 임금의 피난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성면은 본래 우정면(牛井面)이었던 곳이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남쪽 으로 피난하여 공주의 쌍수산성으로 들어갔다. 임금의 일행이 이곳을 지날 때 인조가 타고 가던 소가 몹시 기갈이 심하여 헉헉거리므로 이 우물에서 물을 먹였다. 그때부터 이 우물을 '소우물'이라 하여 유명해지게 되었고, 면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쌍수산성에 피신한 인조 일행은 식량이 떨어져 몹시 곤란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에 사는 관류당 (觀流堂) 노숙(盧潚)이 쌀 300석과 닭 수백 마리를 바쳐 급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에 임금이 노숙 에게 소원을 물으니 "묵정밭의 세금을 덜어 민폐를 적게하여 주소서"하고 아뢰니 "너는 왕을 돕고 농 민을 위하는 사람이구나"고 칭찬하고 친히 마을 이름을 조왕동(助王洞)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역대의 많은 임금 중에서 인조만큼 여러 땅이름에 숱한 일화를 남긴 왕도 드물 것이다.
삼천마을의 세 개의 우물경상남도 함양군 신천리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다. 효성이 지극하면 여러 가지 기적이 일어난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이 이야기도 효자 삼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함양의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천리의 삼천(三泉)마을은 가뭄에 우물이 세 개씩이나 생겼다고 하여 삼천이라고 하고 또 마을 뒤에 있는 백암산의 산혈이 마을로 뻗은 형세가 매화가지같다 하여 매지곡(梅枝谷)이라고도 부른다. 삼천이란 마을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효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우물이 생겼다는 데서 비롯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마음이 착한 삼형제가 정성을 다해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 봉양을 위해서 삼형제는 주야로 번갈아 정성을 쏟고 있었다. 그 때 나라 전체가 사년간이나 혹독한 가뭄을 당하여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식수조차 고갈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이 가뭄으로 인해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발생하였다. 들리는 소문에는 배가 고파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서 사람고기를 먹는다는 흉흉한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뭄으로 인해 농토는 황폐해졌다. 식량만이 아니라 식수까지 고갈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돌림병까지 들어 사람들은 마을을 등지고 하나 둘 떠나는 이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효자 삼형제의 집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형제들은 산속을 헤메어 구해온 초근목피로 홀어머니를 간신히 봉양하고 있었다. 삼형제의 어머니라고 해서 잘 먹고 살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극진히 봉양해도 영양실조분 아니라 병환까지 얻어 삼형제는 서로 의논하여 큰 아들부터 어머니의 영양보충과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식량을 구하러 집을 떠나기로 의논하였다. 그러나 워낙 나라 전체가 가뭄과 흉년이 심해 식량을 구하기란 바다속에서 진주를 찾는 것처럼 어려웠다. 큰아들은 밤낮으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식량도 구하지 못하고 자신이 허기져서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날이 지나도 형님이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둘째가 집을 떠났다. 형님은 식량을 구하지 못했지만 나는 꼭 구해야만 어머니를 봉양할텐데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나섰다. 그러나 둘재 역시 먹을 것을 찾아 헤멨지만 허탕치고 말았다. 그도 역시 배가 고프고 기력이 소진하여 어머니 봉양은커녕 자신이 쓰러져 죽고 말았다. 큰형님에 이어 둘째형님조차 집에 돌아오지 않자 막내는 형님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한 골짜기에서 큰 형님의 주검을 발견하였다. 참으로 슬프고 원통한 일이었다. 막내는 슬픔에 겨워하면서도 큰형님을 어머니 몰래 집 뒤편에 묻고 둘째형님을 찾아나섰다. 며칠을 찾아 헤매다가 바위 밑에서 둘째형님의 주검을 발견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앞이 캄캄하였다. 가슴이 터지는 아픔이었지만 슬픔을 참고 둘째 형님마저 마을뒤에 안장을 했다. 형님들의 죽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홀어머니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막내는 이 모든 것을 참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머니를 봉양하며 지내야 했다. 세사람이 노력해도 어머니를 배불리 봉양하지 못했는데 혼자서는 더욱 벅찬 일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막내를 불렀다. 얘야, 다른 음식은 먹지 못해도 좋으니 물이라도 실컷 마시고 싶구나. 막내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물을 구하기 위해 우물가로 갔다. 그러나 우물은 고갈되어 물이 없고 자갈만 득실거렸다. 가뭄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막내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식량은커녕 물 한바가지를 구하지 못해 그 죄책감으로 형님들의 무덤가에서 통곡하며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빈바가지만 들고 괴로운 마음으로 돌아오다가 그도 그만 쓰러져서 영영 일어서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형님들처럼 길에서 죽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막내가 울며 쓰러진 그 자리에 샘물이 솟아올랐다. 이어 형님들의 무덤 근처에서도 샘이 솟아 흘렀다. 메마른 가뭄에 샘이 세 개씩이나 한꺼번에 생겨서 마을 사람들은 갈증을 풀고 화기를 얻었다. 마을의 효성스러운 삼형제로 인하여 샘물이 솟아오른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세 개의 샘에서 나오는 물로 식수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사용이 되어 이후부터는 이 마을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샘이 셋씩이나 솟은 동네라 하여 삼천(三泉)마을이라 하였고 지금은 세 개의 우물 중에 두개만 남아있다. 삼형제의 효성이 지금도 우물에 얽혀 있어 마을 노인들은 손자들에게 모깃불 대신에 전기불을 켜놓고 꿈많은 그들에게 전설을 들려주고 있다. 이 우물로 인해서 경로효친의 사상을 고취하고 있는 것이다.
도승과 말세 우물골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 사곡리 마을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해 여름. 오랜 가뭄으로 산하대지는 타는 듯 메말랐다. 더위가 어찌나 기승을 부렸던지 한낮이면 사람은 물론 짐승들도 밖에 나오질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스님이 지금의 충청북도 사곡리 마을을 지나며 우물을 찾았다 더위에 먼 길을 오느라 갈증이 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스님의 눈엔 우물이 보이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스님은 어느 집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다. 『주인 계십니까? 지나가는 객승 목이 말라 물 한 그릇 얻어 마실까 합니다.』『대청마루에 잠간 앉아 계세요. 곧 물을 길어 올리겠습니다.』 주인 아낙은 길어다 놓은 물이 없다며 물동이를 이고 밖으로 나갔다. 스님은 아낙의 마음씀이 고마워 대청마루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러나 물길러 간 아낙은 몇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은 목마른 것도 바쁜 길도 잊은 채 호기심이 생겨 아낙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저녁 무렵, 아낙은 얼마나 걸음을 재촉했는지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구슬땀을 닦으면서 물동이를 이고 왔다. 『스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낙은 공손히 물을 떠 올렸다. 우선 시원한 물을 받아 마신 스님은 궁금증을 풀 양으로 아낙에게 물었다. 『거, 샘이 먼가 보군요.』『이 마을엔 샘이 없습니다. 여기서 10리쯤 가서 길어온 물입니다.』 아낙의 수고를 치하한 스님은 무슨 생각에선지 짚고 온 지팡이로 마당을 세 번 두들겨 보았다. 『과연 이 마을은 물이 귀하겠구려. 마을 땅이 층층이 암반으로 덮였으니 원… 그러나 걱정마시오. 내 주인 아주머니의 은공에 보답키 위해 좋은 우물 하나를 선사하고 가리다.』 이 말을 남긴 스님은 그 집을 나와 마을 구석구석을 살폈다. 동네 한복판에 이른 스님은 큰 바위에 다가서서 역시 지팡이를 들어 세 번 두들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우물을 파다가 도승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청년들에게 일렀다. 『이 바위를 파시오.』『스님, 여기는 바위가 아닙니까? 물이 나올 리 만무합니다.』 청년들이 믿기 어렵다는 듯 말했으나 스님의 표정은 태연자약할 뿐아니라 엄숙하기까지 했다. 『자, 어서 여길 파시오. 겨울이면 더운물이 솟아날 것이고 여름이면 냉차 같은 시원한 물이 나올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져도 넘치지 않을 것이오.』 청년들은 도승의 말에 위압당한 듯 어안이벙벙했다. 이때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서더니 스님의 말씀을 믿고 한번 파보자고 제의했다. 장정들이 밤낮으로 사흘을 파도 물줄기는 보이질 않았다. 스님은 계속 팔 것을 명했고, 청년들은 내친걸음이니 시키는 대로 해보자며 작업을 계속했다. 닷새쯤 팠을 때다. 바위 틈새에서 샘물이 솟기 시작했다. 맑고 깨끗한 물이 콸콸 흘러 금방 한길 우물 깊이를 채웠다. 청년들은 기쁨을 감출 수 없어 서로 부여안고 울며 춤을 췄다. 샘물이 솟는다는 소문에 온 마을이 뒤집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물을 구경하러 모여들었고 물을 마시며 기뻐했다. 그들에겐 생명의 샘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습을 아무 표정없이 지켜보던 스님이 입을 열었다. 『자, 조용히 하고 소승의 말을 들으세요. 앞으로 이 우물은 넘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우물이 넘치는 날에는 나라에 큰 변이 있을 것입니다.』 망르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님은 들은 체도 않고 말을 이었다. 『니난날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 임금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만약 이 우물이 넘치는 날에는 그보다 몇 배 더 큰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스님, 이 우물이 그렇게 무서운 우물이면 차라리 지난날처럼 10리밖 개울물을 길어다 먹고 살겠습니다.』『너무 걱정들 마시오. 이 우물이 세 번 넘치는 날이면 이 세상은 말세가 되니까, 그때 여러분은 이 마을을 떠나시오.』 이 말을 남긴 스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표연히 자취를 감췄다. 마을 사람들은 기쁨도 컸지만 한편으로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비슷한 말을 주고 받았다. 『평생 숙원인 우물이 생기긴 했네만….』『과연 기이한 일일세그려.』『그 도승의 말을 너무 염려할 것은 없을 것 같으이.』 그러나 「우물이 세 번만 넘치면 말세가 온다」는 소문은 차츰 멀리 퍼져나갔다. 『과연 우물이 넘칠 것인가.』 사람들의 입에서 화제가 되는 동안 세월은 어느덧 몇 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물 길러 나간 아낙 하나가 우물가에서 기절을 했다. 우물이 철철 넘치고 있었던 거이었다. 이 말은 삽시간에이웃 마을까지 펴졌다. 사람들은 무슨 변이 일어날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 난이 곧 임진왜란이었다. 또 한번 이 우물이 넘친 것은 1950년 6월 25일. 그날도 이 우물은 새벽부터 철철 넘치고 있었다 한다. 6.25의 민족적 비극을 알리기 위한 우물의 충정이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말하고 있다. 아무 일 없이 정량을 유지한 채 조용히 샘솟고 있는 이 우물이 과연 또 넘칠 것인가. 그리고 스님의 예언대로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인가. 약 50호의 농가가 평화롭게 살고 있는 충북 괴산군 증평읍 사곡리 마을의 말세우물. 아무리 많이 퍼 써도, 또 가물거나 장마가 들어도 한결같이 줄지도 늘지도 않은 채 그 깊이 만큼의 정량을 유지하고 마을 사람들의 식수가 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이 지닌 전설을 자랑으로 여기며 부처님 받들 듯 위한다고 한다. 한 스님의 신통력과 예언은 후세인들에게 신비의 전설로서 뿐 아니라 자비의 뜻과 삶의 정도를 일깨워 주고 있다.
천낭정(天娘井)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동리 남쪽에 있는 우물이다. 석간수(石間水) 우물로 수질이 좋은 뿐 아니라 수량에도 변함이 없었다. 장마철이나 한파때나 수량의 변동이 없어 고을에서도 애지중지한 우물이다. 너무 수질이 좋아 천녀가 물을 길어 갔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또 일설에는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린 우물이라 하여 천왕(天王)정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수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한다.